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포스 2세 (문단 편집) === 군제개혁 === [[마케도니아 왕국]]은 오래전부터 [[헤라클레스]]의 후예로서 [[고대 그리스]]의 일원을 자처했지만,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들을 '''반(半) [[바르바로이|야만족]]'''으로 여겼으며, 단지 목재와 목초지의 원산지로서만 유용하다고 여겼다. [[페르시아 전쟁]] 때 [[알렉산드로스 1세(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1세]]가 그리스를 많이 도와줘서 '''그리스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고, [[페르디카스 2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자를 오가면서 많은 이득을 챙겼으며, [[아르켈라오스 1세]]가 그리스 문화를 대대적으로 후원하여 그리스인들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냉소적인 반응만 보였다. 게다가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할 당시의 마케도니아는 지극히 암울했다. 서쪽의 일리리아, 북쪽의 트라키아, 동쪽의 할키디키 반도 도시국가들, 남쪽의 테살리아 및 테베 모두 만만하지 않았으며, 특히 일리리아는 페르디카스 3세를 전사시킨 뒤 마케도니아에 쳐들어와서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필리포스 2세는 일리리아를 포함한 사방의 외세에 수많은 공물을 바치고 서약을 맺음으로써 그들이 만족하고 마케도니아에 더이상 쳐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시간을 번 뒤, 그는 본격적으로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다. 먼저 재위 첫 해에 린케스티다와 엘리미오티스 등 상부 마케도니아 왕국들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빠른 시일에 통합하고, 그들로부터 받아낸 병력으로 일리리아인과의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메꿨다. 뒤이어 역사에 길이남을 군제개혁을 단행한다. 먼저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를 도입했다. 이들은 길이 18피트에 달하는 긴 창, 즉 [[사리사]]를 전원 휴대하게 하고, 전열을 보다 빽빽하게 모아놓으며 선두는 창을 앞에 겨누고, 나머지는 공중에 창을 세우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정면에서의 방어력은 기존의 팔랑크스를 압도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기동력과 측면 공격이 취약해지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병]]의 양과 질을 늘렸다. 왕을 호위하는 [[헤타이로이]] 중기병의 숫자를 대폭 늘리고 철저한 훈련을 실시해 전투력을 올리며, 자신을 단순히 호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장의 양익을 압도하고 적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며, 패주하는 적을 쓸어버리는 임무를 맡겼다. 여기에 [[아르기라스피데스|히파스피스타이]](Hypaspistai: 방패를 든 자) 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은]]으로 도금한 방패, 또는 은빛이 나도록 연마한 철방패를 사용해 '''은방패 부대'''로도 불렸다. 이들은 왕의 방패와 무구를 나르고, 왕의 신변을 경호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정규 부대로 편성되었다. 움직임이 둔하여 전투 도중 이변이 발생했을 때 제때에 대응하기 어려운 팔랑크스를 대신하여 탁월한 기동력과 대응력을 발휘했으며, 산악지대나 늪지대 등 기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거침없이 이동하여 임무를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투석병, 투창병, 궁병의 숫자와 질도 강화했으며, 1년에 12번 월급을 주고 일하는 직업 군인 제도를 실시해 농한기 때만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그리스 국가들과는 달리 어느 때나 전쟁을 할 수 있는 상비군을 갖추었고, 엘리트 기병대에 복무하는 자들에게 토지를 아낌없이 나눠줬다. 그리고 지중해 세계 최초로 장비를 국가에서 마련하게 했으며, 전투병이 직접 식량 등의 군장을 메고 이동해 기동성을 늘렸다. 아울러 그리스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공성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육성하게 해, 공성전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